나의 이야기

50년 세월과의 작별

Bini(비니) 2020. 4. 22. 04:43
50년 세월과의 작별

[작은 고향]

태어난 나라를 고국이라 부르고, 나고 자란 지역을 고향이라 부른다.
고향은 남들이 보기에 지역을 이야기 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태어나서 자라고 50년 이상을 부모님이 그 자리를 지켜 준 경우라면 마을로 한정해야 하겠다.
내 나이 쉰 하고도 여섯에 떠나는 고향과의 이별이란 참으로 낯선 경험이다.

[400년 선조들의 자취]

어린 시절 나는 우리 조상들이 같은 자리에서 17대, 350년을 살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옆동네에는 조상님 묘소만 해도 수십 기가 있었으니 분명 맞는 정보일 것이다.
여기에 더해 내 나이가 쉰을 훌쩍 넘겼으니 그야말로 400년을 지켜 온 고향이다.
다만 오랜 세월 동안 땅과 집터가 이미 다른 이의 소유가 되어 있어서 큰 애착이 없던 터이다.

[반복되는 우물 파기]

마을마다 몇몇 우물이 있고 여러 집에서 공유하며 우물물을 길어 식수와 허드렛 물로 사용했는데 드디어 집 앞마당에 우물을 팠다.
집터가 높은 지역에 있어서 설흔석자, 즉 10여m를 파야 물줄기가 비친다.
급히 1~2m를 더 파고 흉관과 파이프를 묻은 뒤 되메우면 재래식 펌프가 완성된다.
깊이가 큰 만큼 물을 끌어 올리려면 엄청난 힘이 들곤 했다.

[불법 소갈비 채취]

모두가 어렵던 시기에 변변한 땔깜조차 구하기 어려워 소나무 낙엽을 끌어 모아 땔감으로 사용한 기억이 있다.
임산자원 보호를 위해 엄격하게 단속하지만 무언가로 덮어 두면 실제 단속까지 이어지지는 않았었다.
소나무 낙엽을 '소갈비'라 부르곤 했다.
새로 시집 온 새색시들은 소갈비라는 말에 불필요한기대를 갖곤 했었다.

[이웃 사촌]

농촌의 이웃은 진짜 이웃사촌이다.
아니 그 이상의 관계일지도 모른다.
무언가 먹을거리가 있으면 혼자 먹기 아까워 나누기도 하고 없는 살림에도 돈을 모아 추렴을 하곤했다.
한번은 돼지 한 마리를 잡아 아홉 가구가 나눈 적 있다.
부위도 제각각이고 각자의 취향도 다를진대 어떠한 불협화음 없는 나눔은 오랜 세월 함께 한 시골 정서인 까닭이리라.

[굴러온 돌]

언제부터인가 고향을 떠난 사람들 자리에 타향 사람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하긴 나도 고향을 떠나 새로운 지역에 둥지를 틀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이젠 일년에 몇 번 찾는 고향이기에 낯선 느낌마저 든다.
고래등 같은 저택을 짓거나 작은 공장이 들어 오기도 했다.
이젠 박혀 있던 돌 보다는 굴러온 돌이 더 많은 듯....

[강산 다섯 번]

이제 인생의 절반을 살았고 나머지 절반을 부모님 뵈려 찾곤 했던 고향마을을 떠난다.
그 옛날 매년마다 초가지붕을 새로 엮던 집에 기와지붕 개량만도 벌써 두어 차례 했던 낡고 낡은 집이다.
집을 비우고자 가구를 들어내다 보니까 50년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피어오른다.
지금은 대부분 돌아가신 조부모님과 고모님들의 흔적들도 보이고 어떤 목수의 도움도 없이 선친 손으로 지었던 대들보와 기둥들 하나 하나와 작별한다.

[가고파도 못 가는 고향]

한국전쟁으로 인해 피치 못할 실향민이 생기기도 하고 댐 수몰지역이라 고향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본인의 사정에 의해 일찌감치 고향을 떠나기도 한다.
하지만 반백 년 이상을 함께 했던 고향마을과 작별의 순간이다.
몇 남지 않은 이웃에게도 인사차 들렀다.
앞으로도 자주 들러 얼굴이라도 보자며 아쉬워 한다.
하지만 특별한 일이 없다면 갈 수 없는 아니 갈 일이 없는 과거의 고향일 뿐이다.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법 고구마 맛이  (0) 2021.11.14
첫 째딸의 홀로서기(20.12)  (0) 2021.02.12
추억의 낡은 경운기!  (0) 2019.07.10
부서진 어금니  (0) 2018.11.21
편의점 도시락 시리즈  (0) 2018.08.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