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보따리

남해안 일대 가족여행(2007)

Bini(비니) 2007. 6. 9. 00:00
     <남해안 일대 가족여행기 2007.06.09>

내가 사는 강원도 강릉에서는 절대 가깝지 않은 곳이 남해안이다.
그것도 부산처럼 동해안에 근접한 곳과 달리 남해안의 중심이나 서해안 쪽으로 치우친 서남해안은 더욱더 그렇다.

우연한 기회에 회사에서 운영하는 경남 거제시의 수련관에 가족이 다녀오게 되었다.

워낙에 먼 거리라 출발하기에 앞서 우선 기 부터 죽고 출발하는 터라 나름대로 서둘러 집을 나섰다.

요즘이야 고속도로망이 많이 개선되었지만 4년 정도 전에도 이곳 거제도를 다녀온 바 있어서 그리 낯선 곳은 아니고, 소요 시간도 대충은 짐작하고 떠난 참이다.

또 지도책 한 권 딸랑 들고 떠났던 때와 달리 이제는 내비게이션이 크게 한몫 거드는 스마트한 여행이다.

인천 방향의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원주를 막 지나자마자 중앙고속도로 방면으로 접어들었다.

아직은 철이 이른 듯하지만 6월 6일(현충일) 휴무이다 보니까 차량의 행렬이 제법 줄을 잇고 있었다.

아이들이 아직은 초등학교 3, 5학년생으로 지루함을 이기기 힘든 나이라서 내려가는 길에 경북 안동에 잠시 들렀다.

나들목 주변에서 바라본 안동 '하회마을' 안내표지를 보고 갑작스럽게 결정한 것이다.


안동 요금소에서도 약 20여 분을 들어가서야 만난 안동 하회마을은 역시 양반의 도시답게 고택과 시골스런 분위기가 잘 보존되어 있었다.

오랜 돌담과 흙으로 만든 벽, 초가와 기와집이 적당하게 어우러진 분위기는 추억으로 남기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진 속 배경이 되었다.

멀리 마을이 보이는 낙동강 상류 나루터에서 가족사진을 몇 장 찍었는데 이놈의 디지털카메라에 문제가 생겨서 나중에 그만 사진을 날려 버려 아쉬움이 남는다.

이곳 하회마을은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이순신, 권율 장군 등의 인물을 천거하고 왜적의 침입에 방비케 한 공을 세운 서애 유성용 선생의 옛 고택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서애 선생의 고택에는 아직 후손들이 살고 있으며 별도의 장소에 그의 유품전시관이 마련되어 있어 많은 관광객과 함께 둘러보았다.


안동에서 시간 반 가량을 보낸 후에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간단하게 요기를 한 후 다시 장도에 올랐다.

안동에서 대구(서대구) 쪽에는 고속도로 공사를 진행 중이어서 도로 상태가 좋지 않은 편이다.

구마, 88올림픽고속도로로 분기되는 지점에서 마산 방면으로, 마산 근처에서 남해고속도로를 통한 진주 방면으로, 진주 근처에서 대전 통영 간 고속도로를 통해 통영 방면으로 길을 잡았다.

4년 전 대구-마산-사천-고성-통영의 국도와 지방도를 전전하던 때와 달리 대전 통영 간 고속도로가 완공되어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통영은 강릉과 비슷한 시기에 행정구역의 변화 과정을 겪은 도시이다.

1955년 충무시가 통영군과 분리되어 '시'로 승격되고 1995년 도동 복합형태의 충무시-통영군(통영시로 통합)된 것이 강릉시와 명주군이 1995년 통합된 것과 시기도 같으니 말이다.

통영에 다다를 무렵 며칠 전 대형 화재사고가 났던 통영 터널(통영 방면) 이 보였다.

임시 전등을 밝히고 복구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온통 검게 그을린 모습이 개통되지 얼마 되지 않은 터널의 역사에 오점을 남긴 듯한 느낌을 받았다.

통영 요금소에서 국도로 접어들 무렵이 오후 5시가 조금 못 된 시간이다.

강릉에서 출발한 시간(오전 9시 반)에 안동에서 시간 반 시간을 빼고도 6시간가량 걸린 셈이다.

거제도까지 남은 소요시간이 1시간 정도이다.

그래도 4년 전에 비할 바 못 되었다.

당시엔 아마 8시간 이상 걸렸던 것 같다.

신거제대교를 지나 숙소 방향으로 가는 길 역시 몇 년 사이에 몰라보게 정리된 느낌이다.

거제에서도 워낙 구석진 곳이라 소재하고 있는 동부면까지는 험한 산길이 많이 남아 있다.

그래도 구간 구간 4차선 길도 보이고 도로도 넓어진 곳도 많았다.


오후 5시 30분경 목적지에 도착했다.

남국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열대 나무가 주변 경관을 더욱 아름답게 하고 손에 잡힐 듯한 거제의 크고 작은 섬과 많은 양식장이 눈 앞에 펼쳐진 모습이 어쩌면 동해안과는 다른 이국적인 모습을 연출한다.

움푹 패인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는 숙소는 아직 지은 지 5년밖에 안되어서인지 깨끗한 상태였는데 우리에게 배정된 방은 산책하는 사람들의 출입통로와 인접한 1층이라 불편함이 있다.

그리 더운 날씨가 아니라서 커튼을 치고 있으면 다소 불편함은 사라지겠지만 그래도 어디 고층의 객실만 하겠는가?

저녁 여덟 시부터 시작되는 식당의 배식 시간을 지키지 않으면 한 끼를 굶을 수 있을 정도로 엄격하다.

회사에서 지원하는 수련 프로그램이라서 식권은 무료로 받고, 방에 짐 정리도 미룬 채 식당에 갔다.

여러 가지 풍성한 먹거리가 미니 뷔페처럼 진열된 일반적인 단체급식 장소인데 음식은 잘 나오는 편이었다.

식권을 사야 하는 보통의 사람들은 2000원의 돈을 지불해야 하는데 금액에 비해 상당히 가치 있는 저녁식사가 될 것 같다.


저녁 식사 후 대충 짐을 풀고 주변으로 드라이브를 나갔다.

로비를 나서는 중에 주변 해금강과 외도 관광코스 신청을 받는다고 했다.

4년 전 회사의 지원으로 외도 입장료(1인당 5000원)만 내고 다녀왔던 코스인데 아이들이 너무 어렸던 탓인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하여 한참을 망설인 끝에 신청을 했다.

오전에는 해금강과 외도, 오후에는 거제 포로수용소 이렇게 관광하는데 어른, 아이 각각 25000원, 15000원이라 8만 원을 지불하고 가까운 여차 몽돌해수욕장을 찾았다.

굽고 또 굽은 길을 둘러 갔던 길은 도착하여 보니까 전에 왔던 그 장소가 아니었던가?

그때만 해도 작은 딸아이가 다섯 살이었고 날씨도 매섭게 추운 2월이어서 그냥 차를 돌려 돌아왔는데 해변에 내려 주위를 둘러봤다.

먼발치에서는 삼삼오오 둘러앉아 미역을 채취 가공하고 있었는데 파도와 몽돌이 스치듯 미끄러지는 소리가 어촌의 모습을 더욱 평화롭게 느끼게 한다.

여차몽돌해수욕장보다 규모가 한참 더 크다고 하는 학동 몽돌해수욕장에 도착할 무렵 어둠이 짙게 내려앉아 더 이상 구경은 하지 못하고, 수련관 매점에서 캔맥주 몇 개를 구입해 방으로 돌아왔다.

어둠 속에 희미하게 보이는 바닷가 풍경은 한편으로는 무섭기도 하고 주위의 다른 사람들까지 잠을 이룰 무렵 우리도 내일을 위해 서둘러 잠을 청했다.


이튿날!

해상 관광을 위해 서둘러 아침식사를 하고 약속한 시간에 관광버스에 올랐다.

버스에는 안내 도우미가 없었고 운전기사 아저씨는 작업복을 입고 있는 것이 특색 있었다.

정기적인 관광이 아니라서 45인승 차가 만차가 되기 힘들기도 하고 하여 일종의 파트타임의 운전기사가 관광을 담당할 모양이다.

기사 아저씨는 구수한 목소리와 정감 어린 사투리로 주변의 각종 관광명소를 설명하여 주었다.

꽤나 험난한 길임에도 운전하랴 설명 해 주랴......

본래 직업은 대우조선해양 근로자라고 자신을 소개하면서 대우조선에 대한 자랑에 침이 마를 지경이다.

도장포라고 하는 유람선 선착장에서 해금강 방향의 여객선에 올랐다.

도장포 주변에는 '바람의 언덕', '신선대' 등의 명소가 보였다.

유람선 선장 역시 타고난 입담에 유머를 잔뜩 담아 관광객들에게 쏟아 내었다.

해금강 주변의 절경을 타고난 말솜씨로 설명하여 주고 또 십자동굴 안에서는 말 따로 , 운항 따로의 능수능란한 기술을 선보였다.

해금강 주변에는 총각 바위에 얽힌 전설, 해골바위, 사자바위, 천년송의 유래를 구수하게 설명하여 주위의 많은 관광객들에게 박수갈채를 받았다.


20여분 운항해 목적지 '외도'에 도착했다.

별반 달라진 곳은 없지만 그래도 감회가 새롭다.

아이들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지 처음 온 듯한 표정이고 무더운 날씨에 언덕을 오르면서 다소 지쳐 보이는 것 같다.

외도를 개척한 사람은 개인인데 이제는 노부부가 되어 할아버지는 3년쯤 전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각종의 꽃과 나무들이 온갖 바위들로 둘러 쌓여 절경을 이루고 있는 외도에서 한 시간여 지난 후 배를 타고 돌아왔다.

남해안의 바다는 정말로 잔잔했다.

선상에서 배멀미 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을 정도이다.

숙소로 돌아와 점심식사를 하고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다시 관광버스에 올랐다.


거제 포로수용소 유적관에 가는 길은 상당히 험난했다.

주변의 산세는 험난했고 도로는 좁은 곳이 많았다.

가는 도중에 왼편 바닷가에 보이는 삼성조선소와 대우조선소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유적지에 도착하였다.

잘 정리된 공원 입구에는 때마침 호국보훈의 달을 맞이하여 무거운 음악이 흘러 나왔고 엄숙함이 느껴졌다.

관람 방향대로 올라가는 길은 때 아닌 여름 날씨로 꽤나 더웠다.

온도가 30도에 육박하였으니 더운 것도 무리는 아니지......

친공 포로와 반공 포로 간의 갈등과 유혈사태를 볼라치면 정말 사상과 정치의 소용돌이에 대한 죄 없는 희생이 너무 안타까웠다.

전쟁의 발단과 전개, 정리 과정을 한눈으로 볼 수 있는 시청각 자료와 당시의 비행기, 포로 수용 막사 등에 대한 재현 등 많은 볼거리를 마련하여 국내에서는 반공전시관으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울 듯 규모가 컸다.


구경은 잘 하였으되 숙소에서의 마지막 밤에는 노래방이 빠질 수 없다는 두 딸들의 성화에 못 이긴 척하면서 숙소 내 노래방에 들렀다.

30분에 2000원의 적은 돈으로 즐길 수 있는 가족 단위의 작은 방이 몇 개 있는 곳인데 예상을 초월하여 신곡이 상당히 많이 있었다.

PC방, 탁구장, 당구장, 볼링장, 골프연습장 등의 다양한 놀이 시설은 피로한 몸 탓으로 잠시 둘러만 보고 매일 밤 상영하는 영화 구경도 벼르기만 하다가 그냥 돌아왔다.


이튿날은 집으로 돌아오는 날이다.

이틀밖에 안되지만 그래도 편안한 잠자리가 되어 준 숙소에서 돌아오는 길에, 옥포 대우조선소를 견학하기로 했다.

하루 전에 예약이 되어 있어야 하는지라 전날 밤 밑지는 셈 치고 신청을 해 두었던 터라 아침 일찍 전화 확인 후 방문했다.

넓디넓은 조선소는 아름다운 조경으로 조성되어 무슨 공원 입구에 접어든 듯 했다.

오전 10시와 오후 2시에 정기적으로 외부 관광객들에게 버스 관광을 시켜 주는 이 회사는 세계에서 세 번째 규모를 자랑한다고 했다.

안내하는 홍보팀의 직원은 알기 쉽게 비교자료를 곁들여 가면서 설명을 잘 해 주었다.

골리앗 크레인의 크기, 들어 올리는 중량, 하루 먹는 식자재의 양과 23개에 이르는 식당 숫자, 하루에 지불하는 물값이 수억이 되는 등의 이야기에 우리 모두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리고 이곳 옥포는 이순신 장군이 참전 이후 최초의 승전을 하였던 곳이라는 설명도 빼놓지 않았다.

워낙 먼 길을 달려 남해안까지 내려간 김에 전남 남해안 지역에서 1박을 더 하려고 여수 방향으로 방향을 잡았다.

한산도가 있는 통영 여객선터미널에 잠시 들렀는데 배편도 마땅치 않고 소요 시간도 오래 걸리는 데다 딸아이들이 장시간의 여행에 피로가 쌓였는지 집으로 돌아가자고 졸랐다.

그래도 이왕 방향을 잡은 김에 TV에서 자주 보던 보성녹차밭이라도 다녀 올라가자고 서쪽으로 길을 잡았다.

여수와 순천을 지나 보성은 꽤나 오랜 시간 걸려서 도착했다.

광양에서 고속도로를 벗어나 남쪽으로, 서쪽으로 내려가다 보니까 흙탕물이 가득한 저수지 같은 바다가 좌측으로 펼쳐졌고 군데군데 조그마한 녹차밭이 보이는 모습이 보성군에 다다른 모양이다.

내비게이션이 시키는 대로 가다 보니까 보성차밭이 사방 천지에 펼쳐진 고갯마루가 나타났다.

사방 어디를 보아도 산비탈을 개간하여 줄줄이 녹차를 심어 놓은 차밭이 펼쳐져 있었다.

녹차밭은 아침 일찍 이슬이 마르기 전에 볼만하다고 했던가?

고산 지역이라도 온도가 높고 햇볕이 따가운데 녹차밭은 뜨거운 초여름 날씨를 만끽할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기념사진 한 장 찍기도 버거운 그런 지경이었다.


그래도 안 가본 것과는 천지 차이일 것이라 생각하고 더 늦기 전에 강릉으로 길을 잡았다.

보성에서 광주까지도 꽤나 거리가 멀었고 광주에서 강릉으로 올라오는 길도 많은 교통량 탓에 시간이 꽤나 걸렸다.

마음 같아서는 휴게소란 휴게소는 모두 들렀다 가고 싶지만 시간이 너무 지체되어 서너 번의 휴식만을 취한 채 길을 재촉했다.

그리도 뜨거운 날씨와는 대조적으로 대관령 고개를 넘을 무렵에는 짙은 안개와 비가 섞여서 서늘한 느낌을 받을 정도로 날씨 차이가 많이 났다.

잘 보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내가 살고 있는 고향으로의 귀환은 느낌으로도 편안한 마음을 갖게 하는가 보다.

2박 3일의 짧은 기간 동안의 먼 여행이었지만 오랜만의 새로운 삶의 활력소가 되리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