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아래 첫 중계소의 기억 2006.12.03>
[하늘 아래 첫 중계소]
회사에 입사하여 5년 차가 되던 해였다.
아마 한반도에서는 가장 높은 산봉우리 중계소에서 근무했다.
소재지는 강원도 태백시 황지동 산00 번지이다.
그러나 말이 '시' 지역이지 그렇게 높은 산이 있을 수 없다.
해발고도로 1,573 미터이다.
태백 지역이 해발고도가 900여 미터쯤 되니까 그 높은 지역에서도 한참을 더 올라가야 하는 곳이다.
석탄산업 합리화 추진 이전까지만 해도 강원도 태백 하면 꿈의 고원 도시였다.
시쳇말로 길거리에 어슬렁거리는 견공들 조차도 1만 원권 지폐 정도는 거들떠 보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였다.
그러나 탄광에서의 생활이 그리 순탄치만은 않을 것임이 틀림없다.
허구한 날 매몰, 붕괴 사고로 사망자가 발생하고 또 진폐증이라고 하는 직업병으로 평생을 병마와 싸우는 산재 환자가 지금도 넘쳐나고 있기 때문이다.
지역에 대한 소개는 이 정도로 하고 정작 내가 근무하게 될 중계소에 대한 정보를 주변으로부터 미리 탐색했다.
워낙 높은 곳이기에 기온은 한없이 낮고, 공기는 건조하고, 식수가 부족해 눈 녹인 물로 양치만 겨우 할 정도라는 전임 근무자들의 무지막지한 정보를 들어온 터라 아주 긴장된 마음으로 첫 출근을 하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개인용 승용차가 별로 없었고 또 도로 사정이 워낙 열악하여 회사에서는 사륜구동 차량으로 출퇴근을 시켜 주었다.
우려 반, 기대 반의 야릇한 마음을 안고 급경사 급 커브길을 구비 돌아 올라 가는데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좌측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천 길 낭떠러지 같은 곳이고 도로는 자동차 운전 실력이 어느 정도 되지 않으면 자칫 위험할 수 있는 그런 곳이다.
8월의 한여름인데 무더위와는 상반된 서늘한 기운을 맞으면서 차에서 내려 주변의 낯 선 모습을 하나하나 살펴 나갔다.
내가 앞으로 근무해야 할 곳이라서 사전 정보 정도는 대충 들어왔지만, 막상 여러 가지 환경과 근무 여건들이 걱정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1년 중 1/5 가량이 안갯속에 묻혀]
아래에서 볼라치면 낭만적인 구름이 산허리를 감싸 안은 모양이겠지만 정작 산 정상은 찝찝하기 그지없는 짙은 안갯속에 있는 답답하고 오싹한 느낌이다.
물론 아주 간혹 경험하는 드문 일이지만 구름의 높이가 산꼭대기까지 올라오지 않고 산 중턱에 걸린 경우에는 아주 장관이 펼쳐지기도 한다.
해발 1천 육백 미터에 육박하는 높이라서 그런지 주변의 천 2~3백 미터 정도의 높은 산들이 구름 아래에 모습을 감추고 높은 봉우리 몇 개 정도만이 머리를 내어 밀고 있는 그야말로 운해(雲海)를 볼라치면 천상의 멋과 낭만이 어우러지는 그러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주목으로 둘러쌓인 천혜의 비경]
높은 고산지대에만 자생하는 생천사천(生千死千)의 주목이 곳곳에서 오랜 역사와 자연의 신비스러운 자태를 뽐내면서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을 더하고 있다.
국립공원인 인근의 태백산과 이 곳 함백산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주목은 아주 척박한 토질 환경 속에서 매서운 추위와 강한 바람에 견디며, 수 백 년의 기나긴 수명을 자랑하고 있다.
어떤 나무는 벼락에 맞은 듯 껍질과 나뭇가지 일부가 시커멓게 그을린 채 죽어 있고, 한두 개의 가지에서 돋아있는 조금의 잎이 자신의 존재 가치를 희미하게 나타내는 모양이다.
원래 주목은 부식과 해충에 강하여 오래 산다고 하지만 우리네 민족의 다소간 애교 섞인 과장 표현에 의해 천년을 산다고 하는데 실제 수명은 어떨지 궁금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산 바로 아랫마을에 있는 오래된 천년고찰인 정암사(고한읍 소재)에 있는 주목을 보면, 천년을 넘게 사는 주목도 있을 법하다.
실제 나무의 속 부분이 모두 썩어 어른 한 명이 드나들 수 있는 그러한 나무도 멀쩡하게 가지와 잎을 사방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을 보면 더욱 그러한 추측을 뒷받침한다.
[첫눈은 과연 언제 올까?]
어느 해인가?
9월이 채 가기 전인데 마른하늘에서 무언가 내려오고 있었다.
잠시 후에 하늘이 온통 시커멓게 변하면서 그리 작지 않은 눈송이가 흩날리는 것이었다.
워낙 높은 곳이라서 날씨와 기온의 변화는 범인들의 상상을 초월할 경우가 비일비재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본격적인 겨울을 두어 달 남짓 남기고 첫눈이 오는 모양이라니.
하지만 이 것은 내가 직접 경험한 일일 뿐, 오래전부터 근무하였던 분들이야 9월 초에도 눈이 왔다고 하니까 참으로 믿기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큰 눈이 아니고 또 온도가 높기에 바닥에 쌓일 정도는 아니지만, 이렇듯 마른하늘에 눈발이 날리는 것은 워낙 높은 곳이라서 온도의 변화가 변화무쌍한 탓일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실제 이 곳은 아침(새벽) 최저온도, 낮(오후 2시경) 최고 온도라고 하는 단어가 무색할 정도로 온도의 변화가 심한 곳이다.
새벽 온도보다 낮 온도가 5도 이상 낮은 경우도 간혹 있기 때문이다.
[우습게 보다가 큰 코 다친 공사 인부들]
35미터 가량의 철탑에는 각종의 안테나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엄청난 바람과 진동 등의 원인 때문에 볼트가 풀려 추락할 수 있기에, 안테나를 정기적으로 점검을 하는데 외부의 용역업체 직원들이 연간 1회 정도의 보수작업을 하게 된다.
날씨의 특성을 아는지 인부들은 보통의 사람들이 여름의 끝자락 정도로 생각하는 9월에 작업을 시작했다.
물론 옷차림은 초가을에 적합한 수준의 그리 두껍지 않은 긴 소매 옷을 걸치고 있었고 별다른 방한의 대비책은 하지 않은 채 작업을 했다.
오전 일찍 모든 준비를 마쳤지만 갑작스럽게 짙은 안개와 함께 냉기 어린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작업에 차질을 빚었다가는 자칫 먼 길을 다시 와서 작업을 또 해야 하기에 날씨 정도는 대수롭지 않게 치부해 버리고 작업을 강행했다.
그런데 일은 터지고야 말았다.
작업하던 인부 두 명이 습하고 찬 바람 때문에 양쪽 귀에 중증의 동상이 걸려 병원 치료를 하게 된 것이다.
나도 그렇겠지만 그네들도 참으로 어이가 없었을 것이며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돌이켜 생각해 보면 헛웃음이 날 일이 아닐 수 없다.
[연료도 금세 얼어 버리는 낮은 기온]
어느 혹독했던 겨울!
전방의 혹한 속에서 국토방위를 책임지는 군인들이나 느낄 법한 혹한이 우리나라의 다른 곳에서도 찾아온다고 하면 누가 믿을 것인가?
몇몇 직원들과 함께 사륜구동의 디젤 차량으로 중계소에 오른 적이 있다.
갑작스럽게 한전 측의 전기 사정이 나빠진 탓에 긴급하게 올라가느라고 방한용품을 전혀 챙기지 못했다.
때는 1월 초순의 강풍과 함께 눈보라 치던 어느 날 오전이었다.
산 정상에는 영하 30도까지 가리키는 온도계의 바늘이 더 이상 갈 곳을 잃어 그저 멈춰진 상태였다.
이곳은 워낙 높고 또 겨울이 긴 탓에 난방용 보일러나 비상용 발전기 연료(디젤)가 땅속에 매설하여 둔 상태에서도 얼어 버리는 곳이다.
1m 정도의 깊이에 있는, 그것도 물이 아니라 디젤 연료가 언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분들도 있겠지만 아무튼 땅 속 1m 깊이의 파이프 속 연료가 녹으려면 3월 말까지는 족히 기다려야 하는 법이다.
디젤이 언다는 것은 딱딱하게 스케이트장처럼 되는 것이 아니고 부드러운 아이스크림과 같이 연료 속의 특정 물질이 어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디젤 차량의 연료가 얼어붙는 것을 예방하기 위하여 작업하는 동안 엔진을 끄지 않고 세워 두었다.
[고난의 도보 행군, 하산길]
5~6시간이 동안 작업을 서둘러 끝낸 후 발걸음을 재촉하고자 차에 올라 액셀을 밟았는데 추운 날씨 탓에 힘겹게 돌아가던 엔진이 멈춰 버리는 것이었다.
연료 공급 계통이 언 것이 분명했다.
주변의 신문지 등을 동원하여 엔진 아래쪽에서 조금씩 연료 계통의 부품들을 녹이니까 10여 분 만에 겨우 시동이 다시 걸렸는데 급 경사의 내리막길임에도 불구하고 5~6미터를 이동하면 다시 시동이 꺼지고 30여 초를 기다려야 다시 시동이 걸려 5~6미터 주행 하기를 반복했다.
매서운 추위 탓에 제발 조금 따듯한 아랫마을까지만 갈 수 있게 해 달라고 빌고 빌어 봤지만, 이내 차는 더 이상 시동이 걸리지 않고 시체처럼 멈춰 섰다.
방한용품이 준비되지 않아 차를 정비하기 위해 사용하던 기름냄새나는 장갑이며, 쓰다 남은 주유소 일회용 티슈 등 몸 어디라도 감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들고 아랫마을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야속한 눈보라는 산허리를 감으면서 우리가 내려가는 아래 방향에서 휘몰아쳐 왔고, 강한 바람이 더해져서 차마 눈을 뜰 수 없는 상황에도 계속 걷고 걸어야 했다.
길바닥은 얼음 위에 눈이 쌓인 만큼 넘어지기를 밥 먹듯 하였고 함께 동행한 분은 총이라도 있으면 자살하고 싶다는 말을 하였지만 웃을 수 없을 만큼 모두가 절박했다.
기름내 나는 장갑으로 코와 입을 가리고 있는데 선배 하나가 자기 머플러를 찢어 나에게 내어 밀었다.
아내에게 생일 선물로 받은 거라는 말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휴대폰도 없던 시기라서 어느 누구에도 연락을 취하지 못하고 도움도 구하지 못한 채 1시간 이상을 외로운 사투 끝에 마을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문 뒤였다.
숙소가 있는 큰 마을까지 내려가려고 택시를 불렀다.
기다림의 지루함을 떨치고자 상점에서 막걸리와 김치를 요청했다.
막걸리는 반쯤 얼은 상태이고 김치에는 얼음이 씹히는 그야말로 얼음골 막걸리였다.
우리 일행은 곤한 몸을 이끌고 허기진 배를 달래기 위해 시골 내음 물씬 풍기는 허름한 장터에서 돼지국밥을 주문하고 발갛게 상기된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생과 사를 넘나드는 추위와 배고픔]
워낙 높은 지역에 위치하다 보니까 식수와 허드레 물을 위한 지하수조차 끌어올리지 못하는 지경이다.
결국 표고차가 400여 미터 나는 산 중턱에서 계곡에 흐르는 물을 끌어모아 10마력짜리 물펌프를 두 개나 동원해 급수 한다.
물 사정이 최악의 상황이지만 보통의 계절에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12월에서 시작되어 3월 말까지의 4개월 정도의 기간 동안 그야말로 고생문이 열리게 된다.
물을 공급하는 펌프와 송수관이 얼어 버리는 것이다.
송수관은 특수 단열재로 보온을 하고 히터까지 둘러쌓여 있으나 매서운 추위는 피해가지 못한다.
여기에 펌프에도 물 한 방울이라도 남아 있게 되면 그해 겨울은 물 구경 조차 힘들어지게 된다.
3명 1조가 되어 물을 끌어 올리는 특공 작전을 감행하던 때가 생각난다.
중무장을 하고 작은 물통에 물 한 통 받고 아래쪽 1 급수탱크 쪽으로 걸어서 내려간다.
산세가 험할 뿐 아니라 폭설로 인해 어디가 길이고 어디가 가시덤불인지 구분이 안 되는 길을 미끄러지듯이 시간 반 내려가면 물탱크가 나오게 되는데 펌프에 있는 각종의 밸브를 필요한 방향으로 조작하고 물을 조금 붓는다.
그리고 전기 스위치를 올려 압력이 차기를 기다린다.
이때 중간에 있는 2 집수 탱크에서 남아 있던 한 명이 같은 작업을 하면서 물이 올라오기를 기다려야 한다.
1 집수 탱크에서 물을 밀어 올려야 2 집수 탱크에서 릴레이 물 공급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다림이 이렇게 지루한지는 겪어 보지 않은 이들은 절대 모른다.
집수 탱크가 있는 곳은 콘크리트로 만든 작은 건물이지만 옥외와 차이가 있다면 바람이 불지 않는다는 것 말고는 없을 정도이다.
한참을 기다리고 추위와 싸운 후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는 물소리를 들으면 이 얼마나 반가운지......
물소리가 나면 1~2분 후에는 힘차고 요란한 소리와 함께 엄청난 양의 물이 탱크에 쏟아져 들어온다.
그러면 준비했던 대로 다시 정상으로 물을 올리기 위한 작업을 시작하고 철수하게 된다.
한번 물 올리는 작업을 한다는 게 쉽지 않은 탓에 중계소에는 엄청난 크기의 저수탱크가 있다.
탱크의 크기는 약 10만 리터 남짓이다.
이만한 탱크에 물을 올린다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라 거의 하루 반나절이 걸리게 되는데 물을 올리는 중에도 보온재 쌓인 급수 파이프에 흘러가는 물이 조금씩 얼어붙어 버려서 겨울이 끝나 갈 무렵에는 물 올리는 시간이 두세 배는 족히 더 든다.
2월쯤에는 이틀을 꼬박 물 올리는 작업을 해도 물탱크의 절반밖에 채우지 못한 적도 있었다.
[안타까웠던 '나물 캐던 할머니' 동사 소식]
몹시 바람이 세차게 불고 온통 안갯속에 휩싸여 있던 어느 늦봄!
사실 그 위치에 있어서 안개라 표현하였지만, 해발 800여 미터의 태백에서 쳐다보면 산 중턱부터 구름에 덮여 있다는 것이 올바른 표현일 것이다.
7~8월에도 바람 불고 안개 낀 날이면 외투를 입어야 하는 곳이라서 한여름에도 보일러를 켜는 경우가 종종 있는 곳이다.
산나물 채취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는데 아랫 마을 파출소에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할머니 한 분이 나물 캐러 함백산에 올라가셨는데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혹여 산에 올라오시면 파출소로 연락을 달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건물 바깥으로 나갔다.
가시거리가 10여 미터 남짓한 상황이어서 주변에 설치된 철조망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고 철조망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별 사고가 없기를 기원하면서 돌아와 근무하고 있었다.
다음 날 언제 그랬냐는 듯 맑고 따듯한 날씨인데 파출소 순경과 함께 한 무리의 사람들이 중계소에 올라왔다.
우리는 어제 실종되었다던 할머니가 아직 귀가하지 않은 것이라고 직감했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에 구급차 사이렌 소리와 함께 통곡 소리가 들려왔다.
나물 캐던 할머니가 무슨 변고를 당하신 모양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산을 타던 분이라서 그 누구보다 산에 대하여 잘 아실 텐데......
산나물을 한가득 머리에 이고 보이지도 않는 산 정상을 향해 오르다가 결국 허기와 추위에 변을 당하신 것이었다.
산세가 험하고 워낙 안개가 짙어 경찰들도, 가족들도 수색을 포기했던 것이 너무도 안타까웠다.
[죽은 나무가 사람을 살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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