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산' 같았던 아버지의 사랑>
정확하게 1960년대 중반......
시골마을에서 4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나는 어쩌면 주위의 시샘을 받았을 수 있었다.
맞 형의 나이 14살, 부모님 연세가 마흔에 육박하셨으니 늦은 나이에 본 자식이야 그야말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표현이 어울릴 법하다.
하지만 이런 느낌은 아버지를 떠나보낸 후 주위로부터 들은 이야기였다.
어려운 시절, 집 앞 작은 집에서 함께 살던 큰어머니가 어린 나 때문에 아버지에게 구박받았다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다.
한여름인데 문을 닫지 않았다는 이유로, 또 집 주변에 나타난 뱀 한 마리를 죽였다는 이유로 아버지는 손위 형수에게조차 호통까지 치셨다고 한다.
워낙 어린 시절 이야기여서 공감이 가지 않다가도 30대 중반에 태어난 내 소중한 아이들을 볼 때면 이해가 가는 듯하다.
어려운 가정 형편에 막내인 나는 남매들 중에서도 가장 잘 챙겨 먹이셨겠으나 어린 시절 나는 입이 매우 짧은 편이었다.
특히 한참 성장해야 할 중학교 무렵에는 도시락을 두고 학교에 가기 일쑤였다.
잊고 가는 게 아니라 일부러 그럴 때가 더 많았다.
중학교 2학년이었던 어느 날 오전 11시가 되기 직전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친구가 나에게 창밖을 가리키며 아버지가 오셨다는 것이었다.
어린 마음에 놀라서 뛰어 나가자 '왜 점심 도시락을 두고 갔냐'는 호통과 함께 보자기로 싼 도시락을 내어 미신다.
집에서 학교까지 줄잡아도 6킬로미터이다.
자전거를 타고도 30분은 족히 걸릴 거리였는데......
비단 막내인 나뿐만이 아니라 고등학교에 다니며 대입 야간학습을 하던 둘째형에게도 매일같이 따듯한 도시락을 배달해 주셨으니 자식들에 대한 열정과 사랑은 감히 말과 글로는 표현하지 못할 듯하다.
한 번은 시장에서 찐 홍게 한 상자를 구입해 오셨다.
나는 번거로운 음식엔 손이 안 가는 편이라서 김치와 밥에만 수저가 갔다.
홍게 좀 먹으라고 여러 번 말씀하시던 아버지는 가위와 젓가락으로 게살을 해체하여 나에게 건네셨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아버지는 총각김치 오이소박이도 누군가 잘라 놓지 않으면 드시지 않는 분이셨다.
돌이켜 보면 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랑만큼 우리 아이들에게 나눠주지 못한 듯하여 많이 아쉽기도 하다.
지금은 만날 수 없는 아버지에게 편지라도 한번 보내드린다는 생각으로 이 글을 쓴다.
'아버지! 고맙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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