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의 기억!>
[토굴 냉장실]
땅을 반쯤 파고 장작과 볏짚을 덮고 그 위에 두툼하게 흙으로 마무리한 천연 냉장고는 볏짚으로 입구를 막아 언제든 저장된 식재료를 꺼낼 수 있게 만들어져 있었다.
시리도록 추운 한겨울에도 절대 얼지 않게 설계된 이 냉장고는 감자, 배추, 무는 물론이고 잘 밀봉한 음식까지 보관할 수 있었다.
폭설이라도 내리면 때론 입구를 막은 볏짚이 얼어붙기도 하고, 옥외 냉장고까지 다가갈 수 있는 길도 마련해야 했다.
시골에서만 있을 법한 추억이 새록새록하다.
[솔잎 냉장고]
초겨울 서리 맞은 감을 마른 솔잎에 켜켜이 쌓아 나무 상자에 보관하면 얼었다 녹기를 반복하며 먹기 좋은 홍시가 되었다.
감을 깎아 만든 곶감을 감 껍질 말린 것과 함께 시골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간식으로 즐겼었다.
추운 겨울 아이스크림보다 더 달콤한 시원했던 추억의 맛이었다.
겨울이 되어도 감나무 꼭대기엔 감 몇 개가 남아 있었다.
까마귀 먹으라고 남겨 두던 우리 어른들의 마음을 오롯이 담아......
2m가 넘는 산더미 같은 눈에 둘러싸인 창문 밖 커다란 공간이 냉동고가 되었다.
창문을 반쯤 열면 냉장고, 창문을 닫아두면 냉동고로 사용할 수 있었으니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겨우내 풍요로운 음식 곳간으로 활용했던 셈이다.
한 번은 음식에 넣는다고 소주 한 병을 대충 보관했었는데 얼어버린 것을 발견했다.
웬만한 온도엔 잘 얼지 않는 소주이지만 마치 아이스크림 같은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겨우내 부식 재료였던 냉동 대구가 겨울을 나던 곳이기도 했다.
아이스박스와 얼음이 흔해 빠진 요즘이야 대형화된 차량에 싣고 야유회를 떠나면 냉장고와 다를 바 없이 과일과 음료를 시원하게 즐길 수 있지만, 시장이나 상점에서 땡볕 아래서 달구어진 과일과 음료수가 유통되던 옛 시절엔 냉장 이란 단어조차도 생소했었다.
계곡물을 이용해 크고 작은 자갈로 경계를 만들고 음식과 먹거리를 담아두면 적어도 빨리 상하지 않을 정도였지만 그래도 뙤약볕 아래 노출되는 것 보다야 훌륭한 냉장고임에 틀림없었다.
천연 냉장고가 아닌 진짜 냉장고.
가격도 가격 이거니와 전기료가 걱정되어 작은 걸로 사야 한다는 말씀과 함께......
매장에 들르자 중대형 냉장고에 가려 작은 냉장고는 눈에 차지 않았다.
당시 알아 주던 금성전자에서 160리터 용량의 냉장고를 구입하고 배달을 요청했다.
1톤짜리 화물차에 실려 도착한 냉장고는 포장박스까지 더하여져 마치 집채만 하게 보였다.
당연히 너무 큰 냉장고를 골랐다고 아버님께 질타를 받은 것은 두말할 나위 없었다.
요즘 양문형 냉장고와 앞 다투어 크기를 뽐내는 최고급 냉장고가 쏟아져 나오는 세상에 비하면 참으로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동 서를 가르는 해발 800미터가 넘는 산간이기도 하지만 거센 바람이 나뭇가지들 마저 한쪽 방향으로 돌려 놓은 곳이다.
가을 무렵 지인 하나가 대관령 어디엔가 땅을 파고 김칫독을 묻어 두었는데 2~3년 묵혔다가 꺼낸다는 것이 그만 자기가 묻은 곳을 까맣게 잊었다는 것이다.
추운 겨울에도 땅속은 얼지 않고 여름에도 상하지 않아 그야말로 보물 같은 존재인데 이거 제삼자인 내가 생각해도 아깝지 않을 수 없다.
요즘 같은 시기에는 스마트폰으로 사진이라도 찍어 두면 될 일인데......
'추억 속으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항 (0) | 2018.05.09 |
---|---|
낡은 자전거의 추억 (0) | 2018.03.03 |
바나나와 어머니 (0) | 2016.05.28 |
한밤의 미꾸라지 잡이 (0) | 2016.03.03 |
명절을 앞둔 폭설 (0) | 2016.0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