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속으로

마중물

Bini(비니) 2018. 8. 31. 00:09

<마중물>


 

 

[인도네시아 우물]

 

싱가포르를 여행하면서 인근 인도네시아령인 바탐섬에 간 적 있다.

여행코스 중 하나인데 부유한 나라 싱가포르에서도 잠시의 휴식을 즐기러 가는 가까운 섬이다.

인도네시아 본 섬과는 엄청난 거리이지만 삶의 수준은 영락없는 인도네시아이다.

원주민 마을이라는 곳엔 몇몇 우물이 보인다.

호기심에 가까이 다가가 보니 오염된 물에 쓰레기가 둥둥 떠 있다.

이거 관광객을 위한 전통 우물이고 지금은 활용하지 않는 모양이다.

 

[고향마을의 우물]

 

어린 시절 시골집은 동네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었다.

낮은 산지가 대부분이어서 크게 높낮이의 차이가 나지 않는다.

50여 미터 떨어진 아랫집 뒤뜰에 우물이 하나 있었는데 이 우물물이 근처 네댓 집의 식수원이었다.

처음에는 동네 사람들이 힘을 모아 파 놓은 우물이지만 가까운 집은 몰라도 우리 집처럼 떨어진 다른 집들은 불편함이 이만저만 아니다.

결국 집 근처에 우물을 파야 했다.

 

[샘이 깊은 우물]

 

높은 지대에 살다 보니까 지하수의 깊이도 자연히 커질 수밖에 없다.

아랫집 우물은 가뭄이 깊지 않으면 4미터 깊이에 물이 고여 있는데 우리 집은 10여 미터를 파 내려가야 물줄기가 보인다.

하지만 끝이 아니다.

미세하게 새어 나오는 지하수가 어느 정도 고여야 하므로 2미터 정도는 더 깊어야 한다.

이쯤 되면 물과 흙을 같이 끌어올려야 해서 힘이 배로 든다.

우물이 완성되면 커다란 흄관을 두어 개 넣고 파이프를 땅 위까지 올린 후 뚜껑을 닫는다.

그리고 힘들게 끌어올린 흙은 되메우기 한다.

 

[우물의 진화]

 

파이프 끝에는 수동으로 물을 끌어올리는 펌프가 설치된다.

손잡이를 위로 올리고 물을 부은 후 손잡이를 부지런히 오르내린다.

10미터가 넘는 깊이에서 물을 끌어올리려면 한참의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물이 거의 올라올 무렵이면 약한 힘으로는 펌프질이 불가능하다.

어린 시절의 내가 물을 끌어올리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

깊이가 있으니 한두 시간만 지나면 펌프의 물이 빠져나가 물 주전자가 옆에 대기해야 한다.

 

[마중물]

 

한때 집들이 선물로 성냥이 각광받던 시기가 있었다.

미신인지 몰라도 성냥처럼 살림이 일어나라 기원의 의미가 있다지만 내 생각에는 불씨를 지켜야 했던 우리네 어머니들의 한을 풀어 준 것이 성냥인듯하다.

그런데 성냥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마중물이다.

우물물과 섞여도 괜찮은 깨끗한 물이 항상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땅속에 지하수가 차고 넘쳐도 마중물이 없으면 한 방울의 물도 끌어 올릴 수 없다.

바로 그런 존재가 마중물이다

 

[위험한 우물 파기]

 

땅을 파내려 가다 보면 그리 넓지 않은 반경으로 작업을 해야 한다.

너무 넓으면 파 올려야 하는 흙의 양이 늘어나고 너무 좁으면 작업이 어려워진다.

습한 환경에 지하의 음습한 환경에다 산소가 부족해 치명적일 수 있다.

또한 지반이 약한 경우 토사가 무너져 내리는 사고의 위험도 있다.

열악한 환경과 작업 여건에도 불구하고 맑은 물을 찾기 위해 목숨을 걸었는지도 모르겠다.

 

[자동펌프의 등장]

 

전기 사정이 좋아지고 산업발전이 거듭되면서 전기자동펌프가 보급되었다. 가격이 저렴하지 않지만, 이웃 모두가 자동펌프를 설치하면 남들도 따라 하는 게 당연한 것이다.

33자 깊이까지 파 내려간 지하수는 끌어올리기도 힘들지만, 자동펌프도 크고 비싼 녀석이 필요하다.

자동펌프는 삶의 질을 바꿔놓은 또 하나의 걸작이다.

처음 한 번 마중물을 채워 준비가 끝나면 언제고 수도꼭지만 열면 콸콸 쉼 없이 물이 나온다.

 

['물지게']
 

 

옆집에 살던 이웃이 이사를 갔다. 새로 이사 온 집은 나와 형 또래의 형제가 있는 집이다.

먼저 살던 집은 물동이로 물을 길었다.

우물과의 거리가 100여 미터는 족히 된다.

새 이웃은 어디선가 물지게를 가져왔다.

하루에도 몇 번씩 물을 길어 나르다 보면 어깨가 빠지고 키가 자라지 않는단다.

물지게질도 숙련되어야 한다.

중심을 잘못 잡으면 절반도 채 남지 않을 수 있다.

 

[자동 지하수 천공]
 

 

불가피하게 우물 파기의 달인이 되신 아버님께서 돌아가신 이듬해 우물물의 상태가 악화되었다. 그러고 보니 꽤 여러 해 같은 우물을 이용했다.

아버님의 건강이 좋지 않으셨던 점도 있지만 연로하신 분이다.

자동펌프의 등장 이후 지하수 천공 기술의 발달로 우물 파기가 무지 수월해졌다.

마치 목공용 드릴로 목재에 구멍을 뚫는 듯 쉽게 파 내려간다.

고된 우물물 긷기와 우물 파기, 물지게질이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동파를 막아라]
 

 

뭐니 뭐니 해도 겨울철 물 사용을 위해서는 수동펌프가 최고였다. 필요할 때 물을 퍼 올리고는 물을 빼 두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우물물은 땅속에 있어 잘 얼지 않는다.

전기로 끌어올리는 자동펌프가 문제이다.

편리함으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울 녀석이지만 파이프와 펌프 기구에 온통 물이 차 있기에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헌 옷과 헌 이불로 빈틈없는 보온을 해야 하고 심하게 추운 날은 아예 물을 빼 두기도 했다.

 

[안택]

 

시루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김이 뿜어져 나온다.

모처럼 과일도 서너 가지 모습을 보인다.

오늘은 안택 기도가 있는 날이다.

없는 살림에 제사만 아홉 번을 모시는 종손 집에서 집안 살림의 허리가 휠 법 하지만 가정의 안녕을 위해 매년 치르는 연례행사이다.

안방과 부엌, 장독대 등 집안을 지키는 가택 신들께 두루 기도를 하는 의식인데 여기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우물이었다.

그만큼 우물을 소중하게 생각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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